어느 분이 메일로 뭘 문의를 하시면서 조용헌 교수 얘길 하셨다. 나도 좋아하는 분이다. 보통 이야기꾼이 아니다. 듣도보도 못하던 신기한 일들에 대한 얘기를 술술 풀어 놓는 글재주에 홀딱 반했던 때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 인생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던 분이다. 오늘은 그 얘기.
조용헌 교수가 2005년엔 방외지사라는 책을 냈다. 사무실 빌딩 지하에 있던 서점에 머리 식히러 내려갔다가 그 책을 발견했다. 제목만 봤을 땐 무슨 무협소설 같은 것인줄 알았다. 방외니 지사니 하는 말들이 그전에 유행하던 김용의 영웅문 같은 무협소설들에서나 접하던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호기심에 들춰본 책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봤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때까지는 내가 전혀 생각하지 않던, 또 내가 살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들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다.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에 대해 눈을 뜬 순간이었다.

그때가 내 나이도 사십대에 다가가고, 언론엔 사오정 같은 얘기들이 나오면서 정년퇴직때까지 직장을 다닌다는 환상들이 다 깨진 그런 시기였던 것 같다. 그간 살아온 삶의 모든 궤적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직장 다니는 것에만 맞춰져 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던 삶이었다. 직장이후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채기 시작한 시기였던 것 같다. 그냥 직장생활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모아서 은퇴해서 놀러다녀야지 하는 초등학생 수준의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살아오다가 그 나이에 이르러서야 '어! 중간에 그만두면 어떻게되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으니 나도 꽤나 인생에 대해선 덜 떨어진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
직장을 떠난 삶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던 내겐 직장을 다니지 않고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가 너무나 신기해 보였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무슨 거창한 사업을 하는 것들도 아니었다. 그냥 다들 나름대로 어떻게 어떻게든 살아들 가고 있었다. 책에 나온 한사람 한사람의 독특한 삶들에 홀딱 빠져버렸다. 저렇게도 맘대로 하면서 살수가 있구나 하는 자유로운 삶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고, 매달 나오는 월급봉투에 의존해서 사는 생계시스템에 종속되어 있는 삶에서 그렇게나 쉽게 노선을 갈아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혼자도 아니고 딸린 가족들도 있으니 뭔가 좀 더 안정적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때 책속의 이야기들 속에서 눈에 들어 온 것이 둠벙 이야기이다. 차를 평가하는 일을 하는 분에 대한 이야기 속에 그 단어가 있었다. 긴 얘기도 아니다. 그냥 지나가듯이 나온 한 줄의 말일뿐인데 딱 '아! 이거다.' 하는 순간적인 감이 왔다.

둠벙이란 논 가운데나 근처에 샘이 나오는 곳이나 물이 모이는 곳에 만들어 놓은 작은 연못을 말한다. 좀 가물거나 하면 이 둠벙의 물을 퍼 올려서 갈라져가는 논에 숨통을 틔우는 역할을 한다. 늘 물이 고여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둠벙 안엔 미꾸라지, 메기, 붕어 같은 것들이 서식하기도 한다. 가을철이면 둠벙의 물을 다 퍼내고 그 안에 있는 잡다한 고기들을 잡아 동네 아저씨들 한바탕 술자리를 벌릴 수 있는 안주거리도 만들기도 한다. 가을철이면 둠벙 물 퍼내고 미꾸라지 잡고 하는 걸 어릴적엔 자주 봤었다.
조용헌 교수가 그 양반에게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봤다. 딱 내가 묻고 싶은 얘기였다. 그때 나온 대답이 둠벙 하나 파 두었다는 얘기였다. 이런 저런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들 뭔가 독특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만의 독특한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게 바로 둠벙이고, 월급쟁이 생활을 벗어나려면 그런 둠벙을 미리부터 파기 시작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둠벙은 하루아침에 파지는 것이 아니고, 또 파 놓아도 고기들이 들어오려면 기다림의 시간도 필요하다. 하지만, 자기만의 둠벙에 고기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많이 수월해진다. 그런 것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어떤 둠벙을 파아야만 할까에 대한 탐구활동이 시작되었다.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려면 자신만의 작은 둠벙이라도 하나 있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직장생활이란 편할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남이 파놓은 연못에서 활동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은 내 것이 아니다. 연못 속의 메기가 아무리 제것인양 난리를 쳐도 그 연못은 메기의 것이 아니다. 연못을 나온 순간 메기는 메기 매운탕 밖엔 될 것이 없다.

언젠가 자신이 활동하던 연못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면 (대부분의 경우 그렇수 밖엔 없지만) 자기만의 작은 둠벙이라도 하나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처음엔 작을 지라도 시간을 들여 손을 보다보면 점점 더 커지는 것이 자기만의 둠벙이다. 게다가 둠벙은 단순하게 자기기 좋아하는 것만이 아니라, 남들도 오게 해서 돈이 되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기에 그런 둠벙으로 만들기 위해선 탐구의 시간이 길 수 밖엔 없다. 그런 탐구는 직장 다닐때 미래 해 두는 것이 더 좋다. 나와선 기다림의 시간을 길게 가져가기엔 어려운 점들이 많다.
중요한 것은 남의 것이 아닌 자기의 둠벙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가끔 큰 연못을 떠나 다른 작은 남의 연못으로 옮겨가는 것에만 급급한 사람들이 많다. 연못이 크거나 작거나 간에 남의 연못에서는 오래가지 못한다. 돈을 가지고 새로운 둠벙을 만들려는 사람들도 많다. 새 둠벙에 고기들이 모이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뭐든 순환하는 생태계가 만들어지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정말 정말 더 중요한 것 한가지는 둠벙은 처음에는 얻는 것이 없이 계속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상당히 오랜기간 동안 기브앤테이크가 아니라 기브, 기브, 기브의 연속이 될 수 밖엔 없다. 주다보면 얻는 것이 있는 것이지, 하나 주고 하나 얻고는 둠벙 생태계의 원리가 아니다. 뭘 줄 지는 둠벙마다 다르다. 나 같은 경우는 내가 공부한 것들을 블로그와 카페를 통해 공유하는 것이 그런 기브 활동이다.
그때의 그 깨달음 이후로 계속 노력을 해 왔다. 처음 생각과는 달리 예전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 둠벙을 파야하다보니 남들보단 더 많은 시간이 걸린 것 같다. 그래도 나만의 둠벙이 하나 있으니 어찌어찌 버티면서 넓혀 가기만 하면 된다. 제 2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둠벙이라는 말을 화두로 잡고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나만의 둠벙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고 말이다. 샘이 크고, 위치가 좋으면 금방 커질수도 있고, 오랜 시간 공들여도 작은 둠벙을 벗어나질 못할 수도 있다. 무얼 만드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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