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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만 할 행복한 집, 작은 것이라도 좋은 것을 선택해야~

집에 대한 생각

by 제프 주택하자문제전문가 2022. 6. 1.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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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엔 정말 많은 책을 읽었다.

서울 변두리 가난한 동네에 살던 아이로서 읽고 있던 책들 속에 나오는 부자 나라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내용들은 이해가 안가는 구석들이 많이 있었다. 부자 나라라고 다 부자들은 아닌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부자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도 이해못할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어느 책에선가 가볍고 좋은 명품 의자를 하나 사기위해 몇달치 봉급을 털어 넣고도 기분 좋아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해가 안갔다. 그냥 쇠고기나 사먹지... 나에겐 맛있는 것 먹는 것이 더 좋아 보였다.

 

내 작은 통나무 오두막을 짓고 너무 좋았다.

평생 꿈꾸던 나만의 작은 공간을 하나 가지게 되었고, 그것도 손으로 직접 깍아 쌓아 올린 통나무 오두막으로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때이후 내가 이 통나무 오두막에 대해 쓴 글을 본 사람들은 내가 느낀 기분좋은 자부심 같은 것을 많이 눈치채고 느꼈을 것이다. 내겐 좋은 건 감추질 못하는 좀 천진난만한 면도 있다.

산속 작은 통나무집 사진
산속 작은 통나무 오두막

 

지난 번에 내가 산속에 왜 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좀 찾은 것 같다면서 인용한 글이 있었다. 헤밍웨이와 쿠바의 아바나를 여행했던 한 시골 총각이 느낌 감정을 적은 글이다.

 

"참으로 근사한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살이에 마땅히 있어야 하는 즐거움을 위해 사는 순간이었다.

 나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문구가 내게 왜 감동을 주었냐하면 통나무집에 사는 내 자부심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저 글중에서 "마땅히" 하는 한 단어 때문에 그렇다. 나로선 이런 통나무집 생활을 하는 것이 삶에서 어떤 하나의 성취와도 같았던 것인데, 저 글을 보는 순간 그게 아니란 것을 알았다. 이건 마땅히 누렸어야만 하는 것을 단지 이제서야 찾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챘단 얘기이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렸어야만 했던 기본적인 권리 같은 것인데 그간 못 누리고 있었던 것을 드디어 찾았다는 말이다. 

 

"집을 순례하다."란 책을 쓴 나카무라 요시후미라는

건축가의 책을 읽다보면 느끼는 점이 있다. 그 사람의 집에 대한 감성이 대단하다. 집, 공간, 집기, 가구, 건축재료 등등에 대해 그 건축가는 남다른 예민한 감성적인 촉을 가지고 있고 반응한다는 것을 알게된다. 집이란 것에 대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개 가지고 있지 못한, 아니 있었는데 언젠가 사라져버린 부분이다.

 

요시후미씨가 남들이 갖지 못한 감성을 가지고 있기에 대단하다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마땅히"를 본 다음엔 좀 생각이 바뀌었다. 사실은 그런 감성을 우리도 모두 어릴적엔 가지고 있었던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만, 삶에 치이다 보니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혀 버렸을 뿐이다. 언제든지 끄집어 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환경이 만들어 지고 계기만 마련이 된다면...

 

그런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니고 있어야만 할 감성들이

수면아래로 가라앉은 것은 살아온 환경과 현재 살고 있는 환경들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 부자나라의 가난했던 그 책속의 그 사람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명품의자에 집착을 했던 것은 그게 마땅히 지니고 있어야만 할 감성들이 가라앉는 것을 방지해 주는 하나의 구명조끼와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미 가라앉은 것은 끄집어 올리기는 쉽지가 않아도 물에 동동 떠 있기만 하면 언제든지 구해낼 수는 있기 때문이니 말이다. 아마도 그런 것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그 사회가 가진 문화적인 저력 같은 것이라고도 볼수 있겠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저 깊은 곳에 억눌리고 가라앉아 있던 감성들이 꿈틀거리는 것이다. 그런데, 전원생활을 하겠다며 컨테이너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경제적인 고려 때문이다. 과연 차갑고 네모난 컨테이너가 가라앉아 있는 어린시절의 그 애틋한 감성을 다시 끌어올려주는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각지고 딱딱하고 불편한 컨테이너는 잃어버린 감성적인 부분과는 전혀 연결고리가 없다. 그저 부족한 현재 상태의 반영일 뿐이다. 그나마 불쏘시개가 있어야 불이 붙는 상황에서 그런 무감각한 것들은 감성의 불씨에 물을 부어 버리는 꼴이다. 산속에 많은 버려진 컨테이너들이 그런 시도와 힘들었던 과정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컨테이너 사무실 이미지
컨테이너 주택? 사무실?

 

저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감성을 수면위로 끄집어 올려줄 수 있는 것은 기계가 아닌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어야만 한다. 사람의 손으로 정성들여 만들어진 것엔 에너지, 아우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 아우라가 감성들을 끄집어 올려주는 에너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작은 것이라도 좋은 것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그 책속 부자나라의 가난한 사람이 한 것 처럼. 작은 오두막이라도 정성이 깃든 것을 찾을 필요가 있다. 돈이 없으면 차라리 자신이 직접 지으면 된다. 화물이나 들어가는 컨테이너로 쉽게 들어가지 말고...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다. 컨테이너에 적응하면 짐 밖엔 더 되겠는가? 그보단 마땅히 누려야만 할 수준을 되찾는 길을 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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